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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의 생활 건강 정보

약사의 방문, 삶을 돌보다: 일본의 방문 약사 제도에 대하여

by carlos del tor 2025. 4.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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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는 더 이상 병원 안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특히 고령화가 심화된 사회에서는 병원을 스스로 찾아가기 어려운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이들의 건강을 책임지기 위해서는 의료 서비스가 삶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일본은 이러한 사회적 요구에 발맞추어 방문진료와 함께 방문 약사 제도를 확립하였다. 이 제도는 단순히 약을 배달하는 것이 아니라, 약사가 환자의 삶과 생활환경 전반을 파악하고 개입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즉, 약사가 환자의 집으로 직접 찾아가 약을 전달하고, 복약지도를 하고, 약물 안전을 관리하며, 다른 의료진과 소통하는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 제도는 단독 약국이나 지역 약국에서 근무하는 약사가 중심이 되어 운영된다. 약사는 정부 소속 공무원은 아니지만, 이 제도는 일본의 건강보험 체계 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공공의료 시스템의 일환으로 간주된다. 방문약제 관리지도는 건강보험 수가로 인정되며, 환자는 본인 부담금 일부만으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약사는 의사와 간호사, 케어 매니저 등과 긴밀히 협업하며, 지역 단위로 구성된 ‘지역포괄케어시스템’ 안에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이는 의료와 요양, 간병과 복지의 통합적 체계 안에서 약사가 중요한 한 축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방문 약사가 수행하는 업무는 매우 구체적이고 다층적이다. 약을 전달하고 복약지도를 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기능이다. 환자가 약을 제대로 복용하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복용 시간이나 복용 방법에 어려움은 없는지, 인지기능이나 시력, 손의 기능 저하로 인해 복약에 문제가 없는지를 점검한다. 특히 다약제를 복용하는 고령자의 경우, 약물 간 상호작용이나 중복 처방이 자주 발생하기 때문에, 이를 조율하고 주치의에게 피드백하는 역할은 필수적이다. 또한 약사의 눈에 비친 환자의 생활 환경이나 건강 변화는 때로는 의사보다 더 빠르고 구체적인 판단 근거가 되기도 한다. 이 때문에 방문 약사는 의료팀의 일원으로서 회의에 참여하거나 환자 케어 계획 수립에 의견을 제시하는 경우도 있다.

방문 약사는 하루 평균 3명에서 5명 정도의 환자를 찾아간다. 직접 환자의 집이나 요양시설을 방문하여 약을 전달하고, 복약지도를 수행하며, 필요한 경우 약 보관 상태를 점검하고 알약을 분할하거나 복약 캘린더를 구성해주는 등 실질적인 조치도 병행한다. 이러한 업무는 단순한 전달자로서의 기능을 넘어, 환자의 삶을 조율하는 ‘건강 설계자’로서의 역할에 가깝다. 이러한 방문은 보통 약국 내 상주 약사 중 일부가 외부 활동을 전담하거나, 일정한 요일에 계획적으로 이루어지며, 방문 1건당 약 5,000엔 전후의 수가가 책정되어 약국은 이를 통해 건강보험에 청구할 수 있다.

일본 정부는 이러한 방문 약제 서비스를 장려하기 위해 다양한 제도적 지원을 하고 있다. 예를 들어 특정 기준을 충족한 약국에 대해서는 ‘재택의료 협력 약국’으로 지정하고, 의료기관과의 연계 시스템을 강화하며, 전자기록 공유 시스템을 통해 환자 정보를 실시간으로 전달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일부 지자체에서는 약사의 방문 이동을 위한 차량 지원이나 교육 프로그램도 마련하고 있으며, 특히 독거노인이나 말기환자의 복약관리가 중요한 지역에서는 약사가 공공 복지의 일환으로 활동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 제도가 전면적으로 확대되기 위해서는 여전히 넘어야 할 과제들이 존재한다. 약사 인력 부족은 가장 현실적인 문제 중 하나다. 특히 지방 중소도시나 농촌 지역에서는 약사가 턱없이 부족하고, 방문에 필요한 이동 시간과 업무 강도가 높아 참여가 제한적이다. 또한 의료기관과 약국 간 정보 공유가 원활하지 않거나, 환자들이 이 제도를 ‘약 배달’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는 경우도 많아 서비스의 본질이 왜곡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약국 입장에서는 수가 대비 시간과 노동의 강도가 높아, 경제적 인센티브만으로는 방문 서비스를 활성화하기 어려운 구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 방문 약사 제도는 점차 지역 사회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다. 병원 중심의 의료에서 벗어나 환자의 삶터 안에서 치료와 돌봄이 이루어지는 방향으로 의료가 재편되면서, 약사의 역할도 단순한 조제 전문가가 아닌, 환자의 일상과 함께하는 건강관리자로서 재정의되고 있다. 약사가 직접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하고, 관찰하고, 삶을 도와주는 존재가 될 때, 의료는 비로소 사람을 위한 것이 된다. 일본의 이 조용한 변화는, 점점 빠르게 늙어가는 우리 사회에도 깊은 울림을 전하고 있다. 고령화는 피할 수 없는 흐름이지만, 그 안에서 삶을 어떻게 돌볼 것인가에 대한 해답은 바로 이러한 사람 중심의 접근에 담겨 있다. 방문 약사 제도는 단지 하나의 의료 서비스가 아니라, 그 자체로 ‘돌봄의 철학’을 담고 있는 사회적 시스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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