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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공부

반도체,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의 전쟁

by carlos del tor 2025. 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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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매일 손에 쥐는 스마트폰, 자율주행차가 달리는 도로, 인공지능이 계산을 이어가는 데이터센터.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결국 작은 반도체 칩 하나다.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지만, 이 부품이 세상의 거의 모든 디지털 활동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지금, 이 작은 칩을 둘러싼 전 세계의 공급망이 거대한 균열을 겪고 있다. 반도체는 더 이상 기술의 문제만이 아니라, 국가 안보와 세계 권력 질서를 가르는 무기가 되었다.

공급망의 변화는 2020년, 전 세계를 강타한 팬데믹에서 시작됐다. 공장은 멈추고, 항구는 닫히고, 노동자는 사라졌다. 대만, 한국, 말레이시아 같은 반도체 제조의 주요 거점들이 동시에 정지하면서 세계 시장은 극심한 수급 불균형에 빠졌다. 특히 자동차 업계는 수요를 과소예측해 반도체 주문을 취소했지만, 예상과 달리 팬데믹 동안 전자기기 수요는 폭증했다. 결국 2021년 한 해 동안, 자동차 산업은 반도체 부족으로 약 1,130만 대의 생산 차질을 겪었다.

이 위기는 곧 정치적인 대응으로 이어졌다. 가장 먼저 움직인 나라는 미국이었다. 자국 내 반도체 생산 비중이 1990년 37%에서 2020년 12%로 떨어진 것을 문제로 본 미국은, 2022년 8월, 역사적인 법안을 통과시킨다. 바로 CHIPS and Science Act다. 총 2,800억 달러 규모의 예산이 책정되었고, 이 중 520억 달러는 반도체 제조와 R&D에 직접 투입된다. 미국은 이 법을 통해 반도체의 해외 의존도를 낮추고, 주요 기업들이 자국 내에 생산시설을 두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에 따라 TSMC는 미국 애리조나에 400억 달러를 투자해 첨단 반도체 공장을 짓고 있으며, 삼성전자는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170억 달러 규모의 파운드리 공장을 설립 중이다. 인텔도 마찬가지로, 오하이오주에 약 200억 달러를 들여 생산기지를 마련하고 있다. 미국은 단순히 국내 생산을 확대하는 데 그치지 않고, 반도체 공급망을 동맹국 중심으로 재편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자연스럽게 중국의 대응을 불러왔다. 반도체 기술에서 미국과 그 우방에 의존하던 중국은 이제 스스로 기술을 개발하겠다고 선언했다. 특히 2019년 화웨이에 대한 미국의 반도체 수출 제한 이후, 중국은 반도체를 ‘국가 전략’으로 규정하고 전방위적인 투자를 시작했다. 2023년 기준, 중국은 세계 반도체 소비의 35% 이상을 차지하지만, 자급률은 여전히 15%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를 끌어올리기 위해 중국 정부는 수십조 위안에 이르는 정책자금을 투입했고, SMIC, YMTC, CXMT 같은 국영 반도체 기업들은 기술 개발과 생산 확대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

그 결과는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 2022년 중국의 D램 생산 능력은 세계의 **4%**에 불과했지만, 2023년에는 11%, 2024년 말까지는 **16%**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물론 아직까지 TSMC나 삼성전자처럼 최첨단 기술을 구현하지는 못하지만, 중저가 시장에서는 충분히 위협적인 경쟁자다. 중국은 단기적으로는 독자 생존을, 장기적으로는 기술 독립을 지향하고 있다.

유럽과 일본 역시 뒤처지지 않기 위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럽연합은 2022년 'European Chips Act'를 발표하며, 2030년까지 세계 반도체 생산 점유율을 **현재 10%에서 20%**까지 끌어올릴 계획을 세웠다. 여기에 투입되는 예산은 약 430억 유로다. 일본은 TSMC와 협력해 구마모토현에 70억 달러 규모의 반도체 공장을 건설 중이며, 자체 기술 복원을 위해 ‘Rapidus’라는 새 기업도 출범시켰다. 미국과 마찬가지로, 이들 역시 '자국 내 생산'을 통해 위험을 분산하고 공급망을 재설계하려는 의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

이처럼, 반도체 산업은 하나의 통합된 글로벌 공급망 아래 움직이던 시대에서 벗어나, 블록화된 지역 중심의 분할 체제로 전환하고 있다. 미국, 유럽, 일본은 기술 동맹을 기반으로 한 ‘서방 공급망’을 형성하는 중이고, 중국은 자국 중심의 폐쇄형 공급망을 만들어가는 중이다. 그 사이에서 기업들은 새로운 정치적 리스크와 공급 비용 증가라는 도전에 맞서야 한다.

반도체는 단순한 전자부품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날 국제정치의 흐름을 바꾸는 보이지 않는 전선이며, 권력과 기술, 안보가 맞물린 복잡한 전장의 중심이다. 앞으로 이 작은 칩이 어디서, 누구의 손에서, 어떤 방식으로 생산되는가에 따라 세계는 또다시 새로운 질서로 나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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